빈란드 사가의 아쉬운 주제...

2018. 5. 11. 14:58즐기는 나날은.../덕질을 하다

토르핀이 복수에 대한 허무함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과정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새로운 길이 그저 맹목적인 불살을 강박적으로 지키려는 걸 보고 나는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현대 무역상도 해적의 위험에 처해있고, 때론 군인의 도움을 받거나 용병을 고용하기도 하고 직접 총으로 무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인권이란 개념이 자리잡지 않은 그 옛 시대에서 그런 허울좋은 명목에 집착하는 건 어딘지 이상했다.


더욱이 바이킹의 개척 시도는 실패했지만 결국 유럽인들은 원주민이 살던 곳을 정복하고 아메리칸 대륙 신 대륙이라고 부르며 정복했다.


그런데 폭력과 다툼이 없는 신세계라니...


따지고 보면 바이킹 이후의 개척시도는 탄압받던 청교도들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개척은 개척이 아니었다. 대륙엔 사람이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물론 원주민, 일명 인디언들의 조상도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네온 이주민인 건 마찬가지고, 

백인들이 침략할 때까지 그들 나름대로 서로 다툼을 하며 지내왔다. (물론 이걸로 백인들의 침략을 정당화할 순 없다.)


결국 폭력의 역사는 근절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작가가 내세우고 싶은 주제는 알겠지만, 그런 이상적인 주제를 일본인 작가가 내세운다는 게 아리송했다.


따지고 보면 참회하는 가해자가 주인공인 스토리.


전형적인 일본인의 자기 방어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작가가 일본인이란 걸 집어치우고 생각한다고 해도 빈란드 사가의 전제적인 흐름은 뭔가 붕뜬 느낌으로 흘러가고 있다. 




개인적으론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억지로 참회하려하기 보다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범하게 살아가든가.

정말로 힐드에게 복수를 당해주든가. 

개똥철학 집어치우고 전투를 하든 농업을 하든 육아를 하든 상업을 하든 전문 분야에 집중하든가. 

권력자인 크누트 왕을 도와 조금이라도 현실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든가


이렇게 갔어야 한다고 본다. 


그저 사연 있는 바이킹에 불과한 토르핀이란 인물이 현자 놀음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토르핀이란 캐릭터는 신세계를 꿈꿀 자격이 없다. 


적어도 이상을 꿈꾸지만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끝까지 바이킹으로 살다 죽은 아셰라드가 더 나아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앞으로의 스토리는...


새로 등장한 캐릭들


에이널

힐드

가름

구드리드 

시구르드


이들이나


기존의 캐릭터들


토르켈 

이런 인물들(전부일 수도 있고 일부일 수도 있고..)과 같이 아메리칸 대륙으로 떠나는 전개가 예상된다.


원주민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울리는지가 관건이다.(다만 떠나는 장면 자체가 마지막 장면으로 완결 될 수도 있을 듯)